태안에 살면서 아이와 바다를 보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만리포해수욕장이다. 거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태안읍에서 샌드위치 몇 개 사서 돗자리 하나 챙겨 가면 반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데 한 번 가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유를 만들어서 찾게 되는 곳이 됐다.
서해라고 갯뻘 생각하면 오산
만리포를 처음 가는 분들이 서해 바다라고 하면 갯뻘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만리포는 다르다. 모래가 곱고 부드러워서 맨발로 걷기에도 편하고, 물빛도 생각보다 맑다. 서해 특유의 갯벌 냄새나 질척한 바닥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서해임에도 동해 못지않게 모래사장이 넓고 깨끗하다는 점이, 처음 왔을 때 가장 놀랐던 부분이다.
썰물(간조) 때가 되어도 물이 아예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태안의 일부 해변은 물때를 잘못 맞추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겨우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데, 만리포는 그런 걱정이 덜하다. 수심도 완만하게 깊어지는 편이라 아이가 물에 들어가도 지나치게 조마조마하지 않다.
해변이 꽤 넓어서 성수기에도 자리 잡기가 어렵지 않고, 한쪽은 아이와 얕은 물놀이하기 좋은 구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고, 중간 쪽은 파도가 제법 들어와 서퍼들이 즐겨 찾는다. 도착하면 먼저 해변을 한 바퀴 훑어보고 분위기 맞는 자리를 고르면 된다.

모래놀이, 그리고 모래에 묻히기
아이와 만리포에서 가장 많이 한 건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모래놀이다. 백사장이 넓고 모래가 고와서 아이가 구덩이 파고 성 쌓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은 구덩이를 크게 파더니 그 안에 드러누워서 모래를 덮어달라고 했다. 온몸을 모래에 파묻고 얼굴만 내밀고 웃는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 그날 이후로 만리포에 오면 꼭 한 번은 묻히는 게 루틴이 됐다.
모래가 부드럽다 보니 묻힌 채로 꼼지락거려도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귀나 옷 안쪽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건 감수해야 하니, 여벌 옷과 큰 수건은 넉넉히 챙기는 게 좋다.

아이랑 손잡고 파도 앞에 서면 그게 전부
물놀이 장비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좋지만, 사실 아이와 파도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한 시간이 된다. 파도가 발끝까지 올라왔다 물러날 때 아이가 깜짝 놀라며 웃는 그 순간이, 매번 만리포를 다시 찾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수심이 완만해서 튜브 하나 끼워 주면 꽤 오래 놀 수 있고, 모래에 구덩이 파고 성 쌓는 것만으로도 한두 시간은 훌쩍 간다. 아이는 모래와 물 사이를 알아서 오가며 놀고, 어른은 그걸 보며 앉아 있으면 된다. 복잡하게 프로그램을 짜지 않아도 되는 게 아이와 해변 나들이의 묘미다.

해변 피크닉 — 돗자리 하나면 충분하다
우리 가족이 만리포를 찾는 방식은 단순하다. 태안읍에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고, 돗자리를 챙겨서 해변으로 나간다.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펼치면 아이는 모래놀이 하러 냉큼 뛰어나가고, 나와 아내는 해변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먹는다. 아이도 모래놀이하다 지치면 돗자리로 돌아와 한 입 먹고, 다시 뛰어나간다. 그 반복이 하루를 채운다.
해변 뒤편으로는 작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어서, 나무 그늘이 드리우는 자리가 더러 생긴다. 뙤약볕을 피하기 좋아서 성수기 주말에는 그런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일찍 채워지는 편이다. 여름 주말 오후에 자연 그늘 자리를 원한다면 일찍 도착하는 게 낫다. 그늘막이나 파라솔을 준비해 가면 자리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해변 바깥쪽으로는 시멘트 산책로와 데크 구간이 이어져 있어서, 모래사장에 앉기 불편하다면 그쪽에 의자나 파라솔을 펼쳐도 된다. 유모차 끌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는 구간이다.

갈매기에게 새우깡 주기 — 그러다 무서워진 이야기
조형물 앞으로 넓은 광장 같은 공간이 있는데, 우리 아이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게 갈매기에게 새우깡 던져 주는 일이다. 새우깡을 하나 던지면, 그 전까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갈매기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아이는 갈매기 떼를 향해 뛰어가서 하늘로 쫓아 올리고, 다시 새우깡을 던지고 — 이걸 반복하며 한참을 논다.
그런데 어느 날은 갈매기들이 너무 가까이 몰려드는 바람에 아이가 갑자기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보던 나는 얼른 달려가서 안아 줬는데, 그 사이에도 갈매기들은 발치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안겨 있으면서도 새우깡은 계속 던져 주더라.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갈매기들도 제법 능숙해서, 많이 먹었는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낚아채 가는 녀석들도 있다. 새우깡 한 봉지면 꽤 오래 논다. 만리포 올 때 하나 챙겨 가면 아이가 좋아한다.

조형물과 노래비 구경
만리포 해변 입구 쪽에는 독특한 대형 조형물이 있다. 낮에 가면 아이가 주위를 빙빙 돌며 신기해하고, 해가 지는 노을 무렵에는 조형물 뒤로 주황빛 하늘이 펼쳐져 사진 찍기 좋은 스팟이 된다. 밤에는 블루 조명이 들어오는데, 낮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늦은 시간까지 해변에 머문다면 야간 조명까지 보고 가는 걸 추천한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만리포사랑노래비도 있다. 1994년에 세워진 노래비로, 뒤로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찍으면 만리포 분위기가 잘 담긴다. 산책 삼아 한 바퀴 돌아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물닭섬 산책로 — 만리포의 숨겨진 코스
해변만 보고 오기 아쉽다면 천리포 방향으로 가면 물닭섬 산책로를 걸어 보는 걸 추천한다. 해변에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가 나오는데, 한쪽은 만리포, 다른 한쪽은 천리포 방향 바다가 펼쳐진다. 같은 길인데 걷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서, 짧아도 알찬 산책 코스다.
데크를 지나 언덕 위로 올라서면 만리포 해변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변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스케일로, 백사장이 얼마나 넓은지 그제야 실감하게 된다. 데크에서 갯바위 쪽으로 내려가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물빛이 유독 맑아서, 낚시를 하지 않더라도 한참 서서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알아 두면 좋은 점이 있다. 현재 만리포 쪽 데크 일부 구간은 이용이 불가한 상태다. 파손인지 공사 중인지 현장에서 확인하기 어려웠는데, 돌아갈 때는 데크 대신 숲길 같은 언덕을 살짝 타고 내려가면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이 주차장 구간은 사유지라 주차는 안 된다.



만리포 전망타워 — 무료로 360도 만리포를 내려다보다
만리포 해변에서 눈에 띄는 높은 타워가 있다. 바로 만리포 해양전망타워다. 입장료가 무료인데, 안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사방이 통유리로 둘러싸여 있어 360도로 탁 트인 만리포의 풍경이 펼쳐진다. 만리포 해변 전체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멀리 섬과 등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을 때, 아이는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한참을 내려다봤다. “우리가 모래놀이 했던 데가 저기야” 하는 순간이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해가 질 무렵 올라가면 노을과 바다가 동시에 들어오는 풍경이 나와서 타이밍이 잘 맞으면 더 좋다.
밤에는 레이저쇼도 진행된다. 19시 30분부터 21시 30분까지 약 30분 간격으로 총 다섯 번 운영하는데, 레이저 두 줄기가 바다 위로 뻗어나가는 방식이다. 다만 방문했을 때는 레이저 장비 하나가 고장 나 있어서 제대로 된 쇼를 보지 못했다. 언제 수리될지 모르니 기대는 반만 하고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월요일에 방문 계획이라면 타워는 빠지는 게 낫다.


노을이 가장 예쁜 해변
만리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노을이다. 서해라서 해가 바다 쪽으로 넘어가는데, 만리포는 그 방향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다. 특히 여름 노을은 길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하늘 색이 계속 바뀐다. 주황에서 분홍, 옅은 보라로 넘어가는 그라데이션을 한참 서서 보게 된다.
아이와 모래놀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을 시간이 된다. 피크닉 마무리를 노을로 하면 “오늘 참 잘 왔다” 싶은 기분이 드는 해변이다. 간조가 되어 물이 물러난 넓은 모래사장에 노을이 반사되는 풍경은 두고두고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다.


편의시설 — 아이와 와도 불편함이 없다
아이와 외출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게 화장실과 씻는 곳인데, 만리포는 이 부분이 잘 갖춰져 있다. 공용주차장 안에 화장실이 있고, 해안 뒤편으로 큰 화장실이 두 군데 더 있어서 성수기에도 멀리 헤맬 일이 없다. 무료로 씻을 수 있는 샤워 시설도 마련되어 있어서, 물놀이 후 모래와 소금기를 헹구고 가기에 불편함이 없다.
주차는 공용주차장이 여유 있는 편이고, 해안가 길 옆으로도 차를 세우는 경우가 많아서 성수기에도 자리를 찾는 데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주말 낮 시간대에는 좋은 자리가 먼저 채워지니, 여유 있게 도착하는 것이 낫다.
언제 가면 좋을까
여름 성수기가 가장 활기차지만 사람도 가장 많다. 개인적으로 아이와 여유롭게 즐기기 좋았던 건 늦봄과 초가을이다. 햇볕이 적당하고 모래도 너무 뜨겁지 않아서 오래 앉아 있어도 편하다. 한여름이라면 늦은 오후에 도착해서 노을까지 보는 코스를 추천한다. 한낮 뙤약볕을 피할 수 있고, 여름엔 노을이 오래 이어지니 마무리가 늘 만족스럽다.
아이와 갈 때 챙기면 좋은 것
- 여벌 옷과 큰 수건은 넉넉히. 모래에 묻히거나 물놀이하다 보면 한 벌로는 부족하다.
- 한여름 낮 모래는 꽤 뜨겁다. 아이 아쿠아슈즈를 챙기면 발 데일 걱정이 없다.
- 자연 그늘 자리는 성수기 주말에 일찍 채워진다. 그늘막이나 파라솔을 챙기면 자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 갈매기 새우깡은 한 봉지 챙기면 아이가 한참 논다. 단, 갈매기가 가까이 몰려들 수 있으니 어린아이는 옆에서 같이 있는 게 좋다.
- 전망타워는 월요일 휴관. 방문 날짜가 월요일이라면 제외하고 동선을 짜자.
- 해가 지고 나면 불꽃놀이를 즐기는 가족들이 많다.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한 불꽃놀이를 사와서 해변에서 터뜨리는 게 만리포의 여름 밤 풍경이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니 한 번쯤 챙겨 봐도 좋다. 불씨와 쓰레기 정리는 꼭 챙기자.
- 선크림·모자는 필수. 해변 바람에 마른 것 같아도 생각보다 강하게 탄다.
마무리
만리포는 한 번 왔다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자꾸 다시 찾게 되는 곳이다. 물놀이·모래놀이·피크닉·갈매기·데크다리 산책·전망타워·노을까지, 한 해변 안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태안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나들이 장소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해변이다. 주변 맛집과 카페 이야기는 차차 올릴 예정이다.